재밌는 앱은 금방 잊히고 필요한 앱은 남았다
요즘은 Claude Opus 5.5로 작업하고 있다. Fable 5.1을 쓸 때와 달리 토큰이 금방 줄지 않아서 원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붙잡고 할 수 있으니 정말 만족하면서 쓰고 있다. 그러던 중 OpenClaw를 만든 피터 스타인버거의 트윗 (새 창에서 열림)을 봤다.

이제 모델이 평균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보다 더 나은 아키텍처와 훨씬 일관된 코드를 만들어내니 바이브코딩이라는 말은 그만 써야 한다는 글을 인용하면서, 작년에도 했던 말을 다시 한다며 바이브코딩은 멸칭(slur)이라고 했다. 모델이 짜는 코드가 이만큼 좋아졌는데 감으로 대충 짠 것처럼 부르는 건 맞지 않다는 뜻일 텐데, 최근 토이프로젝트 두 개를 만들고 결과를 지켜보면서 코드를 짜는 일 자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데 나도 동의하게 됐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넣어도 좋은 게 나오는 건 아니어서, 가비지 인, 가비지 아웃은 여전히 맞는 말 같다. 결국 차이는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데서 났다.
재밌을 것 같아서 만든 지옥밥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토이프로젝트로 뭘 만들면 좋을까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중 한 분이 맛집을 기록하는 앱을 만들고 있다고 했는데, 그 얘기를 듣다가 먹은 음식 말고 남긴 음식을 기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만든 게 지옥밥 (새 창에서 열림)이다. "음식 남기면 지옥 가서 그거 다 먹어야 한다"는 미신에서 출발해서, 남긴 음식을 찍어 두면 지옥 고양이들이 한 그릇에 비벼 three.js 3D 그릇으로 보여주는 앱이다.

'이렇게 만들면 재밌겠지'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고 실제로 재밌긴 했는데 그 재미는 한순간이었다. 한 번 찍어보고 웃고 나면 다시 열어볼 이유가 없었다. 잔반이란 콘텐츠가 계속 보고 싶은 좋은 것이 아니다 보니 DAU는 계속 하향 곡선을 그렸다.

기능은 의도대로 다 돌아갔고 3D 그릇도 생각한 대로 나왔지만, 사람들이 계속 쓰고 싶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홍보 없이 조금씩 받아지는 otja
반면 옷자 otja (새 창에서 열림)는 따로 홍보라 할 만한 걸 하지 않았다. 최근 당근절을 기념해 프로모션 코드를 무료로 나눠보려고 한 적은 있는데, 생각보다 관심을 받지 못해 다섯 개 정도 나간 게 전부였다. 중고거래를 할 때마다 옷 치수를 재서 적는 게 번거로워서 만든 앱인데, 크기를 아는 기준물과 함께 찍으면 치수를 계산해 기록해 주고 계산은 서버 없이 기기 안에서 모두 끝난다. 그런데 아주 적은 수이긴 하지만 다운로드가 조금씩 꾸준히 생기고 있다. (먼작귀...)

iOS는 지난 한 달 동안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받았고 미국이 그다음이었다. 알린 적도 없는 앱을 일본과 미국에서 누군가 찾아서 받고 있었다.

Android는 대부분 한국 사용자인데 설치 사용자 수가 5~9명 사이에서 줄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터진 것도 아니고 숫자도 작다. 그래도 계속 내려가기만 했던 지옥밥과는 곡선 모양이 달랐다. 지옥밥은 재미를 노렸고 otja는 내가 실제로 겪던 불편을 풀려고 만들었는데, 좋은 서비스를 만들려는 의도가 작게나마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써보세요만 남은 게시판
가끔 눈팅하던 클리앙 개발한당 (새 창에서 열림) 게시판에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첫 페이지에 올라온 글 30개(9월 21일 ~ 10월 14일) 중 24개가 직접 만든 앱이나 서비스를 소개하며 써보라고 권하는 홍보 글이었다. 4년 전인 2022년 9월 무렵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니 30개 중 20개가 막힌 걸 묻는 질문 글이었고, 직접 만든 앱 이야기는 런칭 후기 두 편 정도였다. 다들 만들기만 하고 서로 써보라고 권하기만 하는 모습이 조금 기이해 보였다.
AI가 정보를 너무 잘 알려주니 굳이 사람끼리 묻고 답하며 새로운 정보나 경험을 나눌 일이 없어진 게 아닐까. 막히는 건 AI에게 물어보면 바로 풀리니 질문 글은 사라지고, 그렇게 만든 결과물만 남는 것 같다.
기능을 쉼 없이 붙이는 앱
요즘 토스 앱을 보면 수많은 개발자들이 쉼 없이 기능을 붙이고 있어서 이제는 무슨 앱인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UI와 UX가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쓸 때마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많은 선택지를 주는 앱이 되면서 이제는 예전부터 쓰던 기능만 쓰게 됐다. 선택지가 많고 복잡할수록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힉의 법칙 (새 창에서 열림)처럼, 화면을 열 때마다 뭘 눌러야 할지 고르는 일부터 피곤해졌다.
제이콥의 법칙 (새 창에서 열림)에 따르면 사용자는 이미 익숙한 방식으로 서비스가 동작하길 기대한다고 한다. 그런데 만드는 일이 쉬워진 만큼 기능을 붙이는 일도 쉬워져서,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전에 너무 빠르고 많이 바뀌는 시대가 된 것 같다. 토스뿐만 아니라 AX를 시도하는 수많은 회사들도 저마다의 플랫폼에 기능을 빠르게 붙여 나갈 테니, 이런 기능 확장은 앞으로 더 많은 서비스에서 일어날 것 같다. 다들 엄청 빠르게 달리다 모두가 피로해지는 특이점에 도달하면, 그때는 다들 멈춰서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하는 시기도 조만간 오지 않을까.
결국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감각
코드의 민주화는 정말 이뤄지고 있다. 누구나 원하는 걸 만들 수 있게 됐고 나도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실력은 어디서 갈릴까. 지옥밥과 otja를 나란히 놓고 보니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게 만드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그걸 위한 피처를 설계할 줄 아는 것이 실력이겠구나 싶었다.
지난 글에서 구현을 에이전트에게 맡기기 시작하면 감각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남겼었다. 예전에는 코드를 쓰고 망가뜨리고 고치면서 감각을 길렀다면, 이제는 만든 걸 릴리즈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깨지면서 기르는 게 아닐까 싶다. 아직 답이라기보다는 실마리에 가깝지만, 감각을 기르는 대상이 코드에서 서비스로 옮겨간 것 같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직접 만들어보는 것만큼 다른 좋은 서비스를 써보며 왜 자꾸 손이 가는지 곁눈질하는 일도 필요하다. 만드는 비용이 0에 가까워진 지금은 그런 연습을 하기에 오히려 가장 좋은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던 대로, 사소하지만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가설 하나를 붙잡고 그 기능만 가진 가장 단순한 앱을 릴리즈해볼 생각이다. 반응이 없으면 없는 대로 다음 가설을 세우며 하나씩 쌓아가다 보면, 그게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감각이 되지 않을까.